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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볼거리


 
  안강외바우에서10분거리..양동민속마을 내곡...
  
 작성자 : 외바우실짱
작성일 : 2010-09-20     조회 : 1,651  

 

근암고택(謹庵古宅) 중요민속자료 제76호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공이 지어 살던 집으로 그의 현손(玄孫, 4대손) 홍릉참봉(弘陵參奉) 이희구(李熙久)공의 호를 따라 근암고택(謹庵古宅) 혹은 참봉택이라 부른다. 이 건물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를 완전히 분리시켜 별도의 작은 대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해 놓은 점이다.

안골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집이다. 조선 정조 4년(1780)경에 태로(台老) 이정수(李鼎壽)공이 지어 살던 집으로 그의 현손(玄孫, 4대손) 홍릉참봉(弘陵參奉) 이희구(李熙久)공의 호를 따라 근암고택(謹庵古宅) 혹은 참봉택이라 부른다. 이 건물의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를 완전히 분리시켜 별도의 작은 대문을 통해서 출입하도록 해 놓은 점이다.

일반적인 ㅁ 자 또는 튼 ㅁ 자를 따르지 않고 주거공간의 기능에 따라 집들을 분산 간개한 별격(別格)의 변화를 보이는 예이다. 안채를 ㄱ 자형 평면으로 끝낸 점과 사랑채를 안채의 담밖에 완전 격리시킨 점은 가장 특색있는 변화라 하겠다.

특히 사랑채를 담장 밖으로 격리해서 차단한 것은 중부지방이나 호남의 대가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배치방식이며 그 차단 방식은 별당의 차단 방식과 통한다는 점에서 사랑방에 대한 인식도가 매우 엄격한 데서 채택된 방식으로 짐작된다.
사랑방이 외청으로 돌출되는 배치는 이 마을의 사호당에서도 예를 볼 수가 있으나 그 경우에는 모두 안채와 구조자체가 직접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사랑방이 직접 안마당으로 면해 있거나 사랑 부엌을 통해 통로가 나 있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랑채의 격리배치 방식은 아마도 창건당시 집 주인의 전통적 내외관이나 생활관에 따른 사상적 배경이 작용한 결과로도 짐작된다. ㅁ 자형이나 튼 ㅁ 자형의 폐쇠적 양식이 일반화된 지역에서는 매우 특이한 배치계획인 것이다.
남서향으로 대문간채가 자리잡고 이 대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우측으로 돌면 곧바로 안마당이 있다. 안채는 ㄱ 자형평면을 이루는데 ㄱ 자로 꺾이는 곳에 부엌이 있고 남서향으로 안방과 대청, 건넌방, 작은대청이 일렬로 서 있고 남동향으로 2칸의 광과 1칸의 방이 붙어 있다.

사랑채는 안채 옆에 있는데 대문간채에서 대문으로 들어서지 않고 우측으로 돌면 곧바로 이르게 된다. 一자형으로 2칸의 온돌방과 1칸의 대청으로 되어 있고 방 앞에 좁은 퇴가 있다.

대문간채는 막돌 허튼층쌓기에 방주를 세우고 납도리를 받고 있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한식기와를 입힌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헛간도 대문간채와 비슷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한식기와를 입힌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이 마을은 많은 ㅁ 자형평면을 이루지 않고, 안채, 사랑채, 대문간채 등이 모두 독립적으로 건축된 것이 특색있게 보인다.

상춘헌(賞春軒) 중요민속자료 제75호

안골 초임 우측 동산 근암고택 옆에 자리잡고 있는 이 주택은 상춘고택(賞春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 영조 6년(1730년)경에 동고(東皐) 이덕록(李德祿)공이 건립하였고, 그의 증손으로 예조참의(禮曺參義)와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창애 이정덕(李鼎德)공이 동편 사당을 증축하였으며 그의 손자도 문과 급제를 했다. 그 후 후손인 이석찬(李錫纂)공의 호를 따라 상춘헌(賞春軒)이라 부르며 사랑채의 마당 동편에 계획적인 조경으로 동산을 꾸며 놓았다.

평면은 ㄷ 자형 안채 및 사랑채와 一자형 행랑채가 가깝게 붙어있어 마치 ㅁ 자형 주택처럼 보인다. 즉, 이 마을 큰 집들 가운데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형인 튼 ㅁ 자형을 이루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기능면의 변화가 안방과 부엌의 배치와 관련해서 나타나고 있다. 흔히 부엌으로 배정되는 왼쪽 끝칸 자리에 안방을 두고 있어 부엌을 안방의 옆에 붙이는 일반형과 달리 안방 밑으로 붙이게 되었다. 부엌을 안방 밑에 붙이는 형식은 중부지방 민가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이 집의 경우 안방은 남향방이 되지 못하고 동향방이 되었고 부엌 밑에 방이나 마루 혹은 광을 두지 못하였으며 광은 분리된 아래채에만 두게 되었다.

이 집의 또 다른 변화는 안방머리에 반칸의 찬방을 둔 점과 건넌방을 이원봉 가옥에서처럼 1칸을 대청 쪽으로 당겨놓은 점 건넌방 다음 모서리 반칸을 마루방으로 꾸민 점 등이다. 건넌방에만 달려있어 마루방은 건넌방과 밀접한 기능을 갖게 된다. 평면상으로 보면 안방머리의 반칸 찬방과 이 마루방은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그 기능면에서도 중요한 수장구실을 담당하게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행랑채는 막돌 허튼 층 쌓기 기단위에 막돌처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으며 납도리에 소로받침은 없고 홑처마로 한식기와를 입힌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또 이집의 특이할 만한 점은 산을 등지고 후원에는 죽림이 조성되었으며 사랑채앞 기단을 2단으로 하여 화계(花階)를 만들고 꽃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 사랑채 북단에는 가묘(家廟)가 있는 데 이 북단의 석축을 3단으로 하여 또 화계를 만들어 화목을 심었다. 사랑 후원에 느티나무 숲이 울창하다.  

사호당(沙湖堂) 중요민속자료 제74호
변화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서 바로 연결되는 점이 특징이다.

안골로 들어가는 중간 위치 우측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사호당고택(沙湖堂古宅)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진사(進士)를 지낸 사호당(沙湖堂) 이능승(李能升)공이 1840년경에 지어 살던 집이다. 변화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을 고려하여 안채와 사랑채의 구분이 확실하면서도 문을 통해서 바로 연결되는 점이 특징이다.

사호당 한켠에는 아직도 디딜방아가 놓여 있고 5월에는 귀한 화초인 금낭화가 핀다.
이 마을에서도 가장 일반적 반가형(班家形)인 ㅁ 자형 기본 평면을 갖춘 집이다. 행랑채는 일자형인데 구조상 안채와 연접되어 있지는 않고 있으므로 흔히 있는 튼 ㅁ 자형 집이다.

안채와 사랑채는 비교적 드높은 축단(築壇) 위에 세웠으며 상대적으로 부엌 방에 행랑채는 용마루와 지붕고가 낮추어져 있다. 안방과 부엌과의 고패관계는 낙선당의 경우와 같으며 이 집의 부엌도 대략 3칸이나 되는 크기이고 그 끝에 안사랑과 그에 연접한 작은 누마루를 둔 것은 이 마을 다른 집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안바깥채의 여러 기둥 가운데 안 대청의 중심 기둥과 사랑채마루의 중심주 그리고 전퇴(煎退)의 모서리 기둥만은 굵은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안채, 사랑채의 중심부를 일단 돋보이게 꾸미고 있다. 중심주를 두리기둥으로 보강하는 것은 영남지방 큰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격식이다.

또 건넌방의 위치를 마루방과 바꾸어 놓은 점은 일종의 특색이라 하겠다. 사랑방을 ㅁ 자형의 동변(東邊) 중심부에 두고 안마당 쪽으로 외여닫이를 달아 이방에서 곧바로 안마당을 내려다 볼수 있게 한 점도 흔한 방식이 아니다. 이 집에서 안채사랑채의 마루, 마루방의 변화 있는 배치와 다양한 기능은 매우 특이한 격식을 보여준다.

행랑채는 낮은 막돌 허튼층쌓기 기단에 막돌 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운 납도리집으로 부연없는 한식기와의 맞배집이다.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城) 손씨(孫氏)의 종가이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이다.
一자형의 행랑채와 ㅁ 자형의 몸체가 전후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행랑채는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서 오른쪽 단에 광을 두고 바로 그 옆에 대문간이 자리잡고 있다. 대문간 우측으로는 마루 1칸과 방 2칸이 붙어 있어 행랑채 구실을 하며 그 옆 1칸 이 방에 불때는 함실이며 그 옆 2칸이 광이다.

안채에 해당되는 부분은 2칸의 부엌과 3칸의 안방이 일렬로 남서향으로 자리잡고 여기서 ㄱ 자로 꺾이어 3칸의 정면과 2칸의 측면, 도합 6칸의 넓은 안대청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옆에 2칸의 건넌방이 붙어 있다. 건넌방 앞에는 1칸이 채 못되는 고방이 있고 그 앞에 1칸의 마루와 1칸의 방이 사랑대청과 연결된다.

부엌 북쪽으로는 장독대가 놓이고 사방 1칸의 헛간이 있다. 사랑 마당 앞에는 동북쪽 높은 곳에 三門이 서있고 그 울타리 속에 사당(祠堂) 3칸이 자리잡고 있다.

행랑채는 낮은 벽돌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소로받침은 없으며 삼량(三樑)구조로 홑처마에 한식기와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몸채는 행랑채보다 상당히 높게 막돌허튼층쌓기한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방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다. 안채는 막돌바른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는데 대청 정면의 기둥만은 모두 원주 4개로 처리하였다.가구는 일반상류주택으로는 예외적으로 삼량구조를 이루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대청 전면에는 아무런 창호가 없으나 후면에는 두 짝씩 판장문을 달았는데 문틀 중앙에 설주를 세운 것은 ‘안동 임청각이나 ‘강릉 해운정,‘회덕 동춘당등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처마는 홑처마로서 한식기와의 팔작지붕모양 합각을 만들었으나 사랑채와 와서는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안방 위에 다락을 만들고 대청쪽으로 작은 창을 단 것이 이채로운 점이다.

낙선당(樂善堂) 중요민속자료 제73호

서백당의 북측 산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손중돈 선생의 아우되는 손숙돈(孫叔燉)공이 분가한 집으로 지금은 낙선당 손종로(孫宗老)공의 파주손댁이며, 당시 양반 부잣집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

대문채는 3칸이며 가운데가 문간이고 남쪽 1칸은 행랑방이며 북쪽은 외양간이다. 대문채와 사랑채 사이는 넓은 마당이며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대청이 곧바로 건너다 보인다. 마당의 북변(北邊)에 4칸의 광채가 대문채에 접해서 一자로 세워 졌고 광채와 대문채 사이에는 일각문을 두어 연결짓고 있다. 이 광채는 3칸이 광이고 끝칸은 1칸의 온돌방이다.

ㅁ 字안채에 一字사랑채가 부설되는 일은 보통 있는 예이지만 이처럼 넓은 사랑마당과 그 광채를 여유 있게 안배한 예는 흔치 않은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사랑채의 구조를 자세히 살펴보면 마당에서 나직한 기단 위에 一자로 세워진 5칸 집이며 2칸
대청과 2칸의 온돌방, 2칸 전퇴로 4칸이 구성되고 안쪽 1칸은 1칸반이 뚫린(2칸크기)의 부엌인데 안채의 부엌 아랫방 및 연접된 찬광(마루방)과 직각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랑채에서 안으로 내왕하는 쪽대문과 긴 토방을 이 부엌 앞에서 가로 내었다. 이 때문에 거의 연이어져있어 마치 모든 채가 한 채처럼 보인다.

안채는 ㄷ 자형 평면으로서 꺾인 곳에 부엌을 두고 안방 2칸과 대청 3칸이 전면에 일렬로 늘어서고 여기에 방이 꺾이면서 붙어 있다. 이 건넌방 옆은 불때는 함실이고 그 옆은 광이 된다. 전체적으로 연속된 채로 보이나 실은 각 채가 각각 독립되어 건축된 주택이다.

대문간채는 막돌허튼층쌓기 기단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워 납도리를 받치고 있는 삼량(三樑)집이다. 처마는 홑처마이며 지붕은 한식기와를 얹은 맞배지붕이다.

창은정사(蒼隱精舍)
조선 철종 11년에 창은 이남상(蒼隱 李南祥)공이 건립한 주택으로 ㅁ자 형태의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정교한 건축양식으로 건축학을 공부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공의 아들인 내곡 이재교(內谷 李在嶠)공은 영남유림을 대표하여 대원군(大院君)에게 국정의 개혁을 바라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반집으로는 드물게도 정자(내곡정)을 가지고 있다.
내곡정(內谷亭) 향토문화재

이 정자는 조선후기에 지은 건물로써 마을에서는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수졸당(守拙堂)의 후손인 내곡 이재교(內谷 李在嶠)공이 학문을 수학하기 위해 지은 정자이다.

안골(內谷)이라는 명칭도 바로 공의 호를 따서 붙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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