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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볼거리


 
  안강외바우에서10분거리..양동민속마을 향단...
  
 작성자 : 외바우실짱
작성일 : 2010-09-20     조회 : 1,561  

 
정충비각(旌忠碑閣)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1호
이 비각은 조선 인조(仁祖) 14년(1636) 병자호란 때 순절(殉節)한 낙선당(樂善堂)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중실한 노(奴)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정조(正祖)7년(1783)에 임금의 명으로 세워진 건물이다. 정충비각은 앞면과 옆면이 각 1칸으로 팔작(八作)지붕이어서 가구방법이 특이하다. 옆에 있는 노(奴)의 비를 세운 충노각(忠奴閣)은 정충각(旌忠閣)보다 건물이 못한 편이다.
낙선당은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의 현손으로 광해군(光海君) 10년(1618) 무과에 합격하여 남포현감(藍浦縣監)을 거쳤다. 병자호란 때 경기도 이천(利川)의 쌍령(雙嶺)전투에서 따라온 노(奴) 억부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고 옷가지만으로 장례를 지냈다. 비의 글은 우승지(右承旨) 이정규(李鼎揆)가 짓고 글씨는 정충필(鄭忠弼)이 썼다.
향단(香壇) 보물 제412호

낮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집은 興字型으로 지은 건물로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一자형 평면구조로 몸채를 사이에 두고 좌측에 안채, 우측에 사랑채를 두고 행랑채도 일자형 몸채와 거의 연접해 있어 거의 한 동(棟)처럼 보이는 집약된 평면을 이루고 있다. 또 안마당도 극히 폐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안채의 부엌의 아래층은 헛간모양으로 흙바닥이고 위층은 마루를 놓았으며 벽채 대신 가는 살대들을 수직으로 촘촘히 세워 일반주택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향단이 이처럼 상류주택의 일반적 격식에서 과감히 탈피한 점이 특징적인 데 사실 이러한 점은 풍수사상에 의거한 것이라고 전한다.

대부분의 자재는 70년대 한 번의 보수공사로 대부분 새 부재로 갈아 끼운 것이다.

행랑채는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圓柱)를 세워 소로 받침없이 납도리를 받고 있는 민도리집이다. 사랑채는 같은 시단에 장대석으로 마무리하고 막돌처석을 놓아 원주(圓柱)를 세웠다. 구조양식은 초익공계(初翼工系)이고 가구(架構)는 5량이다. 안채는 낮은 막돌허튼층쌓기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납도리를 받친 민도리 집이다.

행랑채, 사랑채, 안채 모두 홑처마이고 한식기와를 이은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고 행랑채와 사랑채는 양측 박공을 만들어 풍판을 달았다.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442호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

마을 입구 좌측의 언덕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 본 주택은 청백리이자 조선 성종(1469-1494)으로부터 중종(1506-1544)조에 걸친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선생이 손소 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이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고 비어 있다. 격식을 갖추어 간결하게 지은 우수한 주택건축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형산강과 경주를 품어 안는 경관이 일품이다. 관가정(觀稼亭)이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손들이 커가는 모습을 본다는 뜻이다. 특히 아래쪽에 배치된 하인들의 거처인 가립집(초가)4~5채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지금은 손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

중앙에 중문을 두고 사랑채와 안채가 ㅁ 자형으로 배치되었는데 사랑채가 좌우로 더 길게 튀어나온 형태이다. 중앙에 중문을 사이로 왼쪽에 사랑채, 오른쪽에 안채를 두었는데, 사랑채는 방 2칸에 대청 2칸으로 누마루 형식으로 되어있다. 누마루 부분에만 둥근 두리기둥을 사용하여 건물의 다른 부분과 차이를 두었고 마루 아랫부분의 기단을 낮추어 기둥을 세움으로써 정자의 효과를 거두었다. 사랑대청은 대들보 위와 천장사이에 아무런 벽체를 만들지 않은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부엌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방을 그리고 부엌 위쪽에는 작은 대청 2칸, 방 2칸 그리고 꺾이어서 큰 대청이 정면 3칸, 측면 2칸이 자리잡았다. 안채의 건넌방과 사랑방 사이에는 광 2칸과 마루 1칸을 두어 연결시키고 있다.

원래의 관가정은 양쪽 측면과 뒷면만을 담장으로 둘러막아 주택의 앞쪽을 탁트이게 함으로써 낮은 지대의 경관을 보라보게 하였었으나 1981년의 보수로 전면에도 담장을 쌓고 일각내문을 내어 본래의 조망이 감소되었다.

막돌허튼층쌓기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각진 기둥을 세웠다. 그러나 사랑대청에는 4개의 원주를 세웠고 주두를 얹어 초익공계로 꾸몄다. 처마는 홑처마이고 한식기와를 맞배지붕을 이루고 있다.

수운정(水雲亭) 중요민속자료 제80호

조선 선조 15년(1582년)경에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공의 증손인 청허재 손엽(淸虛 齋孫曄)공이 건립한 정자인데, “물과 같이 맑고 구름같이 허무하다.”는 수청운허(水靑雲虛)의 뜻을 따서 수운정 (水雲亭)이라 했다.

마을 외곽 서북방의 높은 암석 위에 세워 안락천과 안강평야가 내려다 보이는 경관이 수려한데, 특히 야경이 좋은 곳이다. 임진왜란때 태조의 수용영상(水容影像, 임금의 초상화)을 이 정자에 이안 (移安)하여 난을 피했다고 전한다. 정자와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목조 한식기와집이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전퇴를 갖추고 있으며 앞쪽으로 계자난간이 설치되어 있다. 툇마루 아래에도 약간 높은 기둥을 설치하여 마치 누각처럼 보인다. 동측 2칸은 온돌방이고 서측 4칸은 대청이다. 행랑채는 온돌방과 마루가 1칸이다. 정자 변주는 모두 두리기둥이나 온돌방에 사용된 내진주만은 네모기둥의 모를 강하게 접어 사용하였다. 가구는 5랑가이며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행랑채는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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