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승민은 선거 막판으로 갈수록 따뜻한 보수, 깨끗한 보수, 대안 보수, 온갖 찬사를 받았습니다. 워낙 홍준표가 보수 같지 않은 보수이다보니 "홍준표를 찍을 거면 차라리 유승민을 찍으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최종 득표율은 6%대. 홍준표의 1/4에 불과합니다. 연령별, 지역별로 나눠 보면, 20대가 유승민을 좀 더 찍었을뿐 자신의 지역구가 있는 대구에서조차 10% 조금 넘긴 게 고작입니다. 대구를 제외한 TK에서는 전국 득표율과 큰 차이도 없습니다. PK에서는 아예 차이가 없습니다. 즉, TK에서 아주 조금 약빨이 먹힌 "지역구"에 불과한 결론입니다. 과연 유승민은 이 정도 성적표로 "대안 보수"가 될 수 있을까요?
유승민을 이야기하려면 "공화"를 먼저 이야기해 합니다. 유승민이 박근혜에 찍혀 원내대표에서 물러날 때 헌법 1조를 이야기했는데 그게 "공화"의 정신입니다. 이후 유승민은 강연을 다니며 "공화"를 설파했습니다. 아무래도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시대정신이 "공화"라는 뜻이겠지요.
여러분은 공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거 공화국 할 때 쓰는 그 단어 아닌가, 맞습니다. 좀 더 쉽게 정리하면, 민주주의가 곧 공화입니다. 그리고 공화의 반대말은 독재입니다. 유승민이 쫓겨나면서 공화를 이야기한 것은, 다시 말하면 지금 세상은 공화가 아닌 독재라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죠. 박근혜가 독재자처럼 군다는 비판입니다. 물론 정작 그 독재자는 그런 고급스러운 비판을 알아먹을 지성이 없다는 것을 간과했지만 시의적절한 비판이었습니다.
그래놓고 유승민은 자신이 무소속으로 출마한 총선에서 박근혜의 "존영"을 걸고 선거에 임했습니다. 새누리당의 반납 요청도 무시했으니 명백한 "고의"입니다. 독재의 희생양으로 쫓겨나 공화를 이야기하더니 정작 그 독재자를 걸고 표를 달라 합니다. 유승민은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겁니다. "나는 박근혜를 버린 게 아니다. 나는 박근혜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잠시 박근혜 밑에 있는 간신들이 나를 쫓아냈지만 나는 당선되어 박근혜에게 돌아갈 것이다."
결국 유승민의 "공화"는 박근혜를 비판한 게 아니라 박근혜 밑에서 박근혜의 눈을 가리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간신들을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이번 대선 과정에서 유승민은 박근혜 정권의 실정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박근혜가 씹다버린 경제민주화의 골자를 거의 계승하여 경제 공약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하던대로 주적론을 가지고 나와 안보 긴장감을 조성했습니다. 박근혜의 실정을 묻자 노무현을 언급하며 물타기합니다. "가짜 보수"로 지칭한 박근혜의 자유당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단지 언행의 품격이 있어 홍준표와 극도로 대비되었다뿐이지 그의 이념과 정책이 박근혜 정권과 차별화되는 게 없습니다.
유승민이 보수의 대안이 되려면, 일단 기존의 보수가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해야죠. 기존의 보수가 틀리지 않았다면 굳이 대안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유승민이 이명박근혜로 대표되는 기존의 새누리 보수가 틀렸다고 하던가요? 그런 말을 못하죠. 자기가 거기 속했는데요. 그것도 힘없는 초선의원도 아니고, 무려 최고의원과 원내대표까지 지낸 4선 의원입니다. 오히려 엄밀히 따지면 홍준표는 변방이었고 유승민은 중심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유승민이 기존 보수를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유승민이 썩어빠진 새누리 자유당을 대신할 합리적 보수의 대안이라 생각하십니까? 그러려면 유승민은 먼저 자신이 이명박근혜 정권 하에 당의 중심으로서 저지른 일들에 대한 최소한의 반성은 필요합니다. 이런 식으로 보면 됩니다. 정의당이 스스로를 민주당을 대신할 진보의 대안이라 주장하는 건 말이 되죠. 하지만 국민의당이 진보의 대안이라 주장하면 코미디입니다. 민주당을 대신할 대안이라 말하려면, 민주당과 상관없는 이들이 더 나은 비전을 가지고 와야죠. 민주당에서 한 자리 해먹다 나간 인간들이 우리가 대안이라고 주장하면 더 들어줄 가치도 없는 코미디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새누리와 무관한 세력이 보수의 대안을 자처하면 모를까 새누리의 중심이었다가 나간 유승민 김무성의 정당이 보수의 대안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겁니다.
냉정히 분석하면, 유승민의 지지율이 소폭이라도 상승한 것은 집단탈당(동료의 배신)과 딸 성추행 사건 직후입니다. TV토론회에서 잘 했다고 평가받을 때(저는 그 평가에 동의하지 않지만)에도 지지율은 바닥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유승민의 능력이나 정책을 보고 지지하기로 결정한 게 아니라 동료한테 배신당하고 딸도 험한 꼴 당하면서도 뭐라도 해보겠다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그 모습에 감동 또는 동정한 것이라고 분석하면 됩니다. 그건 순간의 지지율로 나타날뿐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이제 바른당은 존폐의 기로에 놓여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당을 재건할 좋은 기회입니다. 보나마나 자유당은 문재인 정부의 발목을 잡고 반대만 늘어놓을 텐데, 바른당이 합리적으로 찬성할 것은 찬성하고 자유당을 견제하며 국회가 잘 돌아가게 힘을 보태면, 그런 모습들이 누적되면 보수의 대안이 될 자격을 갖게 되겠죠.
하지만 불과 1년 뒤에 지방선거입니다. 당장 바른당은 영남에서라도 지자체장 하나 배출하기 버겁습니다. 아니, 당선이 문제가 아니라 단일화 압박이나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 현실이기 때문에 소속 의원이 계속 붙어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김무성계는 다 튀었는데 김무성은 남아있는 요상한 동거가 얼마나 지속될까요? 냉정히 말해서 바른당은 빠른 시일 내에 소멸되고 자유당으로 흡수될 확률이 높고, 유승민 남경필 등 소수만 남아서 존재감 없는 정당으로 쪼그라들 확률이 높다고 봅니다.
자유당이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진짜 보수, 대안 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은 모두가 공감할 겁니다. 그러나 유승민은 아닙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반성 없는" 유승민은 아닙니다. 그는 곧 소멸될 미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