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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세에도 그린다, 주님의 영광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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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04-18     조회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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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최고령 화가 개인전 기록… 김병기 화백 신앙 스토리김병기 화백이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작품 ‘산의 동쪽-서사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개인전 ‘여기, 지금’이 개막된 이날은 김 화백의 103세 생일이었다. 그는 대한민국예술원 최고령 회원이다. 뉴시스

“전시를 해서 기쁩니다. 한편으론 제 마음이 약해져 있었어요. 출품작이 50점은 돼야 하는데 그림 몇 점 내놓고 전람회라고 하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약한 자를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약할 때 강하리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말씀이 있지요.”

103세 생일이었던 지난 10일 서울 종로구 평창30길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 ‘여기, 지금’전을 개막한 김병기 화백은 소감을 묻자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며 이같이 답했다.

봄비가 내린 이날 가나아트센터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기자가 모였다. 김 화백이 3년 전 자신이 세운 현역 최고령 화가 개인전 기록을 또 깨는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시에는 근작과 대표작을 합쳐 20여점이 나왔다. 2년 사이 그린 근작이 15점가량 된다. 전시작들은 일부 소품을 제외하고는 60~100호 대작들이 대부분이다.

90세도, 99세도 아닌 103세다. 서서 하는 미술 작업은 강도 높은 노동이다. 놀라울 정도의 작업량을 내놓은 것인데도 더 많은 작품을 내놓지 못한 게 아쉬웠던 모양이다. 물론 그도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는 안다. “100살 넘은 사람이 그림 그리는 것은 힘들어요. 이건 세계사적으로도 없는 일입니다.”

김 화백의 작품 세계는 추상과 구상, 형상과 비형상을 넘나든다. ‘산의 동쪽-서사시’를 보자. 화면을 분할하듯 가로 세로의 긴 선이 몇 개 있다. 그 사이로 멀리 산이 보인다. 화면 아래에는 최소의 조형언어라 할 수 있는 삼각형과 사각형이 있다. “그리다 보니 분할된 한국이 생각이 나요. 남북이 갈라지고, 도가 갈라지고, 그런 한국의 상태가 느껴져요.”

김 화백은 자신의 작업에 대해 “추상을 넘어 오브제를 넘어 원초적인 수공업적 상태에 도달한 선의 세계”라고 요약했다. 기성품 소변기를 뒤집어 놓고 ‘샘’이라고 이름 붙인 현대미술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 이후 등장한 개념미술에 대한 반박이다. 그는 “현대미술 작가들이 아이디어만 내놓고 조수에게 틀을 짜라, 물감을 부어라 지시해서 작품을 완성한다”며 “나는 현대미술의 그런 허위성에 반발한다”고 했다. 직접 붓을 휘둘러 물감을 칠하는 수공업적 제작 방식을 자신이 왜 고수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다 2015년 영구 귀국한 김 화백은 만 100세 되던 2016년에 ‘백세청풍전’을 열었다. 여세를 몰아 지난해에 또 개인전을 하려 했으나 폐렴에 걸려 중환자실 신세를 지면서 불발됐다.

이날 그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건강해 보였다. 지팡이에 의지하긴 했지만, 전시장을 돌며 작품을 일일이 설명했다. 누군가 작업시간을 묻자 “그런 질문을 제일 싫어한다. 나는 예술가지 노동자가 아니잖냐”며 눙치기도 했다.

김 화백은 광복 이전 한국교회의 중심지였던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나고 자랐다. 신앙심 깊은 모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앙을 가졌다. 부친은 1세대 일본 유학파 서양화가이자 컬렉터였던 김찬영이다.

삶의 고비마다 김 화백을 인도한 것은 신앙이었다. 장수하며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도 기도에 있다고 소개했다. “기도하면서 ‘부자 되게 해주세요, 건강 주세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요. 그런 기도는 수억 명이 하지 않겠어요. 하나님이 바빠요. 비슷한 건 다 못들어 주실 거예요. 그래서 기도문을 바꿔요. ‘비록 늙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을 좀 더 하고 싶습니다’라고. 그 순간, 힘도 주시고 재능도 주시지요. 하나님을 위해 일할 때는 저도 몰래 힘이 나지요.” 전시는 5월 12일까지.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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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과 한국교회] <2부> 독립운동과 한국교회 (11) 제암교회와 제암리 학살 사건최용 제암교회 목사가 지난 15일 경기도 화성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의 순국기념비를 가리키며 이 자리에 1919년 불탄 제암리 교회가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 15일 오전 10시 경기도 화성 향남읍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4·15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500여명의 성도와 시민들이 엄숙한 분위기 속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순국기념관은 100년 전 일제에 의해 23명이 목숨을 잃은 제암리 교회 옛터 옆에 있다. 교회는 사라졌지만 아픔은 남았다.

1919년 4월 15일 조용한 시골 마을에서 믿기 힘든 참상이 벌어졌다. ‘탕, 탕, 탕.’ 제암리 교회에 갇힌 21명의 주민에게 일본 경찰과 헌병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교회는 초가집에 십자가를 올린 작은 예배당이었다.

일경은 열흘 전인 5일 발안장터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을 가혹한 매질로 진압했다. 일경은 그날의 일을 사과하겠다며 마을에 나타나 15세 이상 남자들을 교회로 불러모았다. 영문도 모른 채 교회 문턱을 넘은 이들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복음이 선포되던 교회가 한순간에 사지로 변했다. 사격을 멈춘 일경은 불까지 질렀다. 증거 인멸을 위해서였다. 불길은 삽시간에 초가를 삼켰다.

남편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두 여인이 교회 마당에 주저앉아 오열하기 시작했다. 일경은 슬피 울었다는 이유로 칼을 휘둘렀다. 이날 교회 안팎에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 유가족들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현장을 목격한 주민들도 입을 열 수 없었다.

제암리 학살 직후 현장을 찾은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가 촬영한 학살 현장 사진.

자칫 묻힐뻔 했던 학살의 참상은 사흘 뒤인 18일 현장을 찾은 프랭크 W 스코필드 선교사에 의해 전 세계에 폭로됐다. 일제는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뺌했다. 주범인 아리타 중위를 재판에 넘겼지만 일본군사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진상은 다시 묻혔다. 일본 정부의 사과도 없었다. 고통은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화성시는 2001년 학살 현장에서 200m쯤 떨어진 자리에 순국기념관을 세웠다. 기념관 2층엔 제암교회(최용 목사)가 세워졌다. 순국기념관엔 연간 10만여명이 방문한다. 최용 목사와 교인들은 제암리 학살의 참상을 후대에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강신범 원로목사도 순국기념관을 찾는 이들을 직접 안내한다. 학살 후 집단 매장됐던 피해자들의 유골은 1982년에야 발굴됐다. 수습한 유골은 제암교회 왼쪽 언덕에 합장했다.

최 목사는 “제암리 학살 사건 후 두 번째 희년을 맞았지만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현실이 아프다”고 말했다. 희년은 이스라엘에서 50년마다 선포하는 안식과 자유의 해를 의미한다. 제암리 학살이 일어난 뒤 100년이 지났음을 두 차례 희년으로 표현한 것이다.

“일본은 여전히 제암리 학살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과를 기대하는 건 무리죠.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일부라도 일본 학생들이 순국기념관을 찾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몇몇 미션스쿨들이 수학여행 때 순국기념관 방문 일정을 넣습니다. 기념관에 와서야 선조들의 만행을 접하고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화해의 가능성을 엿봅니다. 일본의 위정자들이 이곳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 흘리는 날이 와야 합니다.” 최 목사는 이같이 말하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했다.

제암교회의 올해 표어는 ‘새로운 희년을 선포하라’다. 한·일 간의 앙금을 50년 안에 씻어내자는 바람을 담았다. 일본의 사과가 화해의 출발점이다. 이를 위해선 양국 교회의 교류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최 목사는 제안했다. 그는 1960년대 말 일본의 목회자들이 제암교회를 방문했던 일을 소개했다.

“그때 일본 기독교인들이 1000만엔의 성금을 모아 교회를 찾았습니다. 거금이었습니다. 교인들이 참회의 마음을 담아 성금을 모았다고 합니다. 절반은 유족에게 드렸고 나머지는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의 순국기념관과 교회가 들어선 것입니다.” 최 목사는 이 같은 우정을 이어받아 양국 교회가 교류하는 꿈을 꾸고 있다.

강 원로목사도 거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제암리 교회는 일종의 해방 공간이었습니다. 워낙 시골이어서 가능했던 일이죠. 그때 담임이던 김교철 전도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과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내용이 나오는 본문을 갖고 주로 설교했어요. 용감했었죠. 그러니 교회에만 오면 독립과 해방이 손에 잡힐 듯했을 겁니다. 이런 설교를 들은 교인들은 광목 천에 태극기를 그려 장날마다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일경이 교회로 찾아와 보복한 겁니다.”

3·1운동순국기념관에서 15일 열린 ‘4·15 제암리 학살사건 10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화성 월문초등학교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강 목사는 신앙 선배들의 용기를 생각하면 지금도 숙연해진다고 했다. 그는 “우리도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면서 “선배들이 목숨 걸고 남긴 교훈이 우리의 다짐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화성=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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