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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바일게임 pc로하기 말인가? 가지런한 안 아저씨의 휭하니 없기 오호이승택 개인전 ‘(언)바운드’노끈에 묶여 움푹 패인 듯 한 돌·도자기‘묶기’ 연작, 기발하고 흥미로운 시각효과서구 조각개념 거부, 독창적 ‘비조각’ 주창고집스런 전위예술로 수십년 동안 외톨이19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선두에
‘매어진 백자’(2017) 갤러리현대 제공그냥 툭 던져놓은 노끈 한 타래가 저절로 스르르 풀렸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스스로 스르르. 그렇게 노끈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늘어지고 풀어지며 움직이는 모습에 매료돼버렸다. 우리나라 첫 설치미술가 이승택이 훗날 평생 함께하게 된 예술 작업의 소재, 노끈과 처음 만난 순간이다. 고드랫돌을 노끈에 달아 매달았을 땐 팽팽하게 늘어지는 노끈의 탄성에서 중력을 확인하고, 고드랫돌과 도자기, 토르소, 캔버스, 칼 등에 노끈을 매어보니 사물들은 물렁하니 언제든 형태가 변화하는 유기체처럼, 어딘가에 결박돼 있을 뿐인 살아있는 존재들처럼 보였다. 노끈은 사물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이승택의 대리인이 됐다. “무엇이든 묶기만 하면 다르게 보이더라”, “딱딱한 물건이었는데 변화하는 노끈에 매임으로써 상태에 머무르게 하는 트릭이 와닿았다”, “노끈은 내가 사물에 생명을 부여하는 방법이다.” 이승택이 과거 인터뷰와 기고문에서 한 말이다.서울 종로구 삼청로 갤러리현대에서 이승택(90) 개인전 ‘(언)바운드’((Un)Bound)가 한창이다.
이승택 작가조각가이면서 화가이기도, 또는 둘 다 아니기도 한 그는 ‘이승택’이라는 이름 석자로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다. 홍익대에서 조각과를 나왔지만 조각을 거부하는 ‘비조각’을 주창했고, 바람이나 물, 불처럼 조각할 수 없는 것들로 ‘조각’을 한다고 했다. ‘설치미술’이라는 말조차 없던 시절 시도한 예술이기에, 그는 이제 한국 최초의 설치미술가라고도 불린다.이번 전시는 이승택의 다양한 작품세계 중 ‘묶기’라는 행위를 중심으로 한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자리다. 노끈에 매어진 사물 작품인 묶기(bind) 연작은 기발하고 흥미로운 반전의 시각효과를 낸다. 마치 연약한 노끈을 이기지 못하고 노끈에 깎인 듯한 톱과 칼, 도자기, 암석, 돌멩이 등은 실은 모두 작가가 사전에 갈고 깎아내며 홈을 파내는 조각행위를 가미한 뒤, 그 자리에 노끈을 묶은 것이다. 묶기 연작은 거꾸로 생각하게 하고, 거꾸로 착각하게 하며 오인을 불러일으키고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노끈에 매어진 돌멩이 고드랫돌 작품을 보고 있으면, 딱딱한 돌에서 물렁한 돌이 되고 다시 물렁한 궁둥이로 변화한 끝에 딱딱한 궁둥이로 보이며 인식을 교란하고 전복한다. 미대 재학 시절 민속박물관에서 우리 전통 고드랫돌을 본 순간 강렬한 인상을 받아 묶기 연작을 시작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전시는 묶기라는 이승택 작품 세계의 핵심 행위를 중심으로 묶기 연작, 노끈으로 묶지는 않았으나 매인 흔적을 간직한 작품, 묶기 개념이 자유로워진 캔버스 작품, 세 부류 작품을 보여주며 이승택이란 누구인가, 이승택의 작품이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핵심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전시장에는 개성 강하고 고집스러운 전위예술가 특유의 힘이 차오른다.
‘매어진 돌’(1989) 갤러리현대 제공이승택은 전위적 형식과 개념, 한국적·민속적·민중적 소재로 수십년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일군 예술가지만, 뒤늦게 빛을 봤다. 청년 미술가 시절인 1950년대 후반부터 일찌감치 ‘거꾸로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근대화를 부르짖고 서구 조각을 모방하기 바쁠 때, 서구 조각 개념을 거부하며 한국 설치미술의 기원이 될 예술 세계의 문을 열었다. 국가 권력이 궁중 예술을 국보와 보물로 지정하고 예술과 비예술을 정하고 남길 것과 버릴 것을 찍어 누르던 시절에, 소외되는 민중 생활용품을 일부러 소재로 삼았다. 민속적 믿음이나 샤머니즘이 배척당할 때 오히려 그곳에서 한국적인 것의 정체성을 찾았다. 미술사학자 조수진이 그를 “시대의 내부고발자”라고 표현하는 이유다. 홍대와 서울대로 편을 짜 독과점하는 한국 미술계를 비판하며 어디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외골수, 외톨이로 수십년 불리면서도 그는 “우리나라 미술계가 공부를 안 한다”, “무식하니 날 알아볼 수가 있나”, “한국 미술계와는 얘기가 안 된다”, “세계는 나로부터 시작된다”고 하며 순치되지 않았다. 그가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2009년 백남준아트센터미술상 수상을 계기로 해외 기획자와 미술관들에게 알려지고 소장된 때부터다. 그는 내년 미국 뉴욕 구겐하임미술관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에서 한국 국립현대미술관 공동 주최로 열리는 1960∼1970년대 한국 실험 미술 조명 전시의 선두에 선다.
‘무제’(1981) 갤러리현대 제공전시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영순 미술사학자는 198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토론장 일화를 꺼냈다. “이승택 선생님이 오셔서는 꼬불꼬불한 머리, 고집 세게 생긴 얼굴로 (서구를 모방하는) 다른 작가들을 비판하면서 우리 전통 소재 고드랫돌 이야기를 설득력 있게 전개했다. 이승택은 ‘포스트 콜로니얼(탈식민주의)’이란 용어가 학계 담론에 등장하기도 전부터 이미 그런 감각을 갖고 있던 예술가였다”고 말했다. 두 학자는 한국 예술이 서구의 후발주자란 뜻의 “지연된 모더니즘”일 때, 이승택은 “동시대의 인터내셔널리스트(국제미술가)”였다고 입을 모았다.
‘고드랫돌’(1957) 갤러리현대 제공이승택의 ‘역설을 시각화’하는 트릭은 묘하게도 그가 살아낸 90년 생과 겹친다. 그의 말은 청년 시절부터 구순의 지금까지 거침이 없었고, 작품에 쓴 자신의 얼굴은 언제나 하늘로 치켜뜬 눈썹, 꼬장꼬장한 풍모를 담은 날카로운 표정이다. 그런 그는 1932년 함경남도 고원에서 태어나 남한에 내려온 실향민이다. 한반도 지붕, 개마고원에서 나고 자랐고 18세에 국군이 돼 남하한 뒤 평생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북에서는 인민군 징집을 피하려 김일성 동상을 만들었고, 남에서는 누가 알아주지 않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지키는 동안 생계 방편으로 맥아더 장군 동상을 만들며 살았다. 재주가 그를 구하면서 고단한 인생을 버텼다. 어머니가 힘들게 사시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훗날 다른 실향민에게서 들었다. 그는 군인 시절 입은 무릎 총상 탓에 오래 앉아있지 못한다. 어머니는 잃었으나 아내와 가족만큼은 끝까지 돌보려는 책임감으로 지금도 술,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는다. 그를 생각하면 강한 외톨이, 약한 고집쟁이, 평범한 선구자 같은 말들이 떠오른다. 반전의 트릭이 인생에도 배어, 삶과 예술을 일치시킨 예술가로 다가온다. 7월3일까지.